시스터2009

인슐린의 발견


아마추어 연구자들의 열정이 이룬 쾌거 - 인슐린 발견
이재담(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

   1921년 5월 16일, 프레데릭 밴팅과 찰스 베스트는 토론토 의과대학 생리학교실에서 실험을 시작했다. 밴팅은 개업이 잘 되지 않아 여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틈틈이 의학도서관에 들려 논문을 읽으며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던 29세의 젊은 정형외과 의사였다. 한편 베스트는 생리학교실의 주임교수 맥클로드가 밴팅의 실험조수로 추천한 21세의 의과대학생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췌장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당뇨병 관련 물질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의학계에서 췌장과 당뇨병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1889년에 폰메링과 민코프스키가 개에서 췌장을 제거하여 인위적으로 당뇨병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한 이 후 여러 사람들이 당뇨병 관련 물질은 췌장의 랑겔한스 섬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나도록 이 물질을 실제로 분리해 낸 사람은 없었다.

   밴팅은 아직 아무도 이 물질을 분리하지 못한 이유가 췌장에서 분비되는 효소액이 실험과정에서 당뇨병 관련 물질을 소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의 췌관을 묶어 소화액을 분비하는 조직을 위축시킨 뒤에 나머지 췌장조직에서 원하는 물질을 추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밴팅의 가정은 틀려 있었다. 췌관을 묶은 지 10주가 지나도 조직의 위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개의 췌장전체를 원료로 실험을 계속했다.

   7월 27일, 결국 그들은 당뇨병 관련 물질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비결은 췌장조직을 분리 즉시 찬 링거액에 담가 저온 상태를 유지하면서 산성 알코올을 추출액으로 사용하였던 데에 있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었지만 이는 췌장의 단백질 분해효소작용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중대한 조건들이었다. 9월 8일에는 추출한 물질을 췌장을 제거한 당뇨병 개에게 다시 주사하여 혈당이 저하하는 것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이 추출액 속에 들어있을 물질을, 랑겔한스 섬에서 추출한 물질이라는 뜻에서 ‘작은 섬’을 의미하는 ‘아일레친’이라고 명명했다가 나중에 같은 뜻의 라틴어인 ‘인슐린’으로 고쳤다.

   이제는 더 많은 양의 인슐린을 얻기 위해 지혜를 짜낼 때였다. 그들은 먼저 도살장에서 소 태아의 췌장을 얻어 다량의 추출액을 얻었다. 이 추출액으로는 당뇨병 개를 70일 동안이나 생존시키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얼마 후에는 어른 소의 췌장에서 추출하는 데에도 성공해 인슐린을 더욱 쉽게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921년 12월 2일, 최초로 인슐린 치료를 받기 위한 당뇨병 환자가 토론토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13세 된 환자의 이름은 레오너드 톰슨이었다. 톰슨 소년이 당뇨병 진단을 받은 것은 2년 전인 1919년 12월의 일이었다. 엄격한 식이요법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체중은 자꾸 줄었고 다량의 당뇨를 배출했다. 이제는 인슐린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해가 바뀐 1월 11일, 드디어 새로운 치료법이 시행되었다. 소의 췌장 추출액을 약하게 희석한 첫 번째 주사를 맞은 톰슨의 혈당은 당장 25퍼센트 저하했다. 매일 주사를 놓자 소년의 소변에서 검출되는 포도당의 양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월 초 열흘간의 주사가 끝나 치료를 중단하자 소년의 상태는 곧 입원 당시로 되돌아갔다. 다시 인슐린 주사가 개시되었고 한 달 후 환자는 매일 주사를 맞는 조건으로 퇴원했다. (톰슨은 그 후로 13년을 더 살았다. 사망원인은 당뇨병과 전혀 무관한 오토바이 사고였다.)

   밴팅과 베스트는 이 경험을 <캐나다의학협회잡지>에 발표했다. 세계 최초로 당뇨병 치료법을 알아내려던 두 젊은이의 모험이 멋진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밴팅과 베스트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인슐린 발견과 노벨상에 얽힌 다툼
이재담(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

   밴팅에게 마지못해 실험실 사용을 허가했던 맥클로드 주임교수는 인슐린 실험의 성공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 실험이 가진 의미의 중대성을 직감했다. 그는 원래 자신이 하던 연구를 제쳐놓고 이 새로운 물질의 생리활성 연구에 교실의 전 역량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생화학자 콜립은 이 때부터 실험에 참여해 베스트와 교대하였는데 인슐린을 순수하게 분리하는 데 공헌하였다. 맥클로드팀의 연구는 내분비학을 새로이 정립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전 세계의 이목은 갑자기 당뇨병 치료의 중심으로 떠오른 토론토에 집중되었다.

   1923년 드디어 인슐린 발견이라는 업적에 대해 노벨상이 주어졌다. 수상자는 맥클로드와 밴팅이었다. 그러나 밴팅은 애당초 자신을 무시하며 실험을 반대했던 맥클로드가 노벨상까지 받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밴팅이 볼 때 맥클로드는 여름휴가를 스코틀랜드에서 지내고 돌아와 처음에는 밴팅과 베스트의 발견을 믿지도 않다가 당뇨병 개가 인슐린 주사로 생존하는 것을 보고서야 실험을 인정했던 비협조적인 인물이었다. 노벨상 수상식에도 불참한 밴팅은 수상 후 상금 4만 달러를 공동연구자였던 베스트와 나누어 갖겠다고 선언했다. 수상자 선정에 대한 항의의 뜻을 우회적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맥클로드는 자신도 상금을 인슐린 분리정제법을 완성한 콜립과 나누겠다고 맞불을 놓았다.

   맥클로드에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라이프치히와 베를린에서 공부한 영국출신의 맥클로드는 독일식 전통에 따라 인슐린 발견이 자신의 업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밴팅이나 베스트를 자기가 직접 지도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이 발견이 생리학교실의 실험실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교실 책임자인 자신이 책임연구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그 후 발표한 논문이나 강연은 은연중에 인슐린 발견자가 자신이고 밴팅과 베스트는 자신의 연구원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풍겼다. 맥클로드는 수상연설에서도 자신의 지도하에 밴팅 등이 인슐린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 노벨상에 얽힌 분쟁은 그 후로도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밴팅과 맥클로드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고 맥클로드는 평생 자신이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는 점을 해명하고 다녀야 했다.

   오늘 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인슐린 발견을 최초로 알린 중요한 보고 세 편 모두에 밴팅과 베스트의 이름만 들어 있거나 혹은 이들이 제 1, 2 저자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밴팅과 베스트에게 상을 주었어야 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학계에서 훈련을 받았고 그 관습에 젖어 있었던 맥클로드의 주장 역시 이해할 수 있으며, 결국이 문제는 신대륙과 구대륙 의학계의 문화적 차이, 혹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학자들간의 세대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젊고 순수했던 밴팅과 베스트는 인슐린에 관한 모든 권리를 단 1달러에 토론토대학에 양도했다. 릴리 제약회사가 대학을 도와 인슐린의 대량생산에 들어갔고 일 년이 지나지 않아서 인슐린 치료는 당뇨병의 표준적 치료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캐나다 정부는 밴팅의 업적을 기려 최초의 당뇨병 환자를 치료한 토론토종합병원 정면에 밴팅연구소를 세웠다(나중에는 베스트를 위한 연구소도 밴팅연구소 바로 옆에 세워졌는데 두 건물은 구름다리로 연결되었다). 18년간 이 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하다 2차 세계대전 중 징집된 밴팅 소령은 1941년 2월 2일, 자신이 개발한 새 비행복을 시험하기 위해 쌍발폭격기를 타고 영국을 향하던 중 뉴펀들랜드의 눈 덮인 산중에 추락하여 화려한 생애의 막을 닫았다. 베스트는 밴팅이 사망한 후 토론토대학 밴팅-베스트 의학연구부장 및 베스트연구소장을 역임하였으며 1978년 3월 31일 79세 때에 심부전으로 사망하였다.

2006. 12. 15.


2012/01/28 10:36 2012/01/2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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